2016. 5. 31. 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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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nB 2016. 5. 22. 13:42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무더운 여름, 키세가 황금빛 모래알이 펼쳐진 모래사장을 바라보았다.


"나도 바- 다-!"

"안 돼."

"왜!"

"화장 지워지니까."


 단호한 코디의 말에 키세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파라솔 안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바다에 와서 몸에 물 하나 묻히지 못하고 지금까지 일을 하고 있자니 온 몸이 찌뿌둥한 것 같았다. 촬영이 끝나면 들어가게 해줄게. 저를 달래는 매니저의 말에 자신이 애냐며 투덜거린 키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른 시작하죠!"

"애 맞네."

"애지 뭐."


 키세의 조름으로 빨리 시작된 촬영은 예상보다 이른 시간에 끝이 났다. 내일도 촬영 있으니까 적당히 놀아. 매니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키세가 신나게 바다로 뛰어들었다. 시원한 바닷물이 제 몸을 감싸는 느낌이 기분이 좋아 조금 더 물 속으로 들어갔다. 키세, 멀리 가지 마! 저 멀리서 매니저의 목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일본 맞아?'


 오키나와가 일본 본토에서 멀리 떨어져 있긴 하지만 제 시야에 보이는 풍경은 태평양이 아닌 대서양의 바닷속 같았다. 푸르게 빛나는 산호초들을 헤치며 물고기떼들을 구경하던 키세가 물 밖으로 나왔다.


"아."


 물을 뜨려고 했는지 그릇을 들고 엉거주춤 서있는 소년과 눈이 마주쳤다. 아, 안녕하심까. 지금 나 좀 바보 같지 않았나? 제 인사에 놀란 표정을 지은 소년을 보며 키세가 생각했다. 안녕하세요. 이내 제 인사를 받아주는 소년에 고개를 드니 제게 손을 내미는 소년이었다. 그 손을 잡으니 덩치에 맞지 않는 힘으로 저를 위로 이끌었다.


"눈?"


 키세의 눈에 보인 것은 만년설이 뒤덮힌 푸른 언덕이었다. 수영복 하나만 달랑 입고 있어 차가운 바람에 몸이 저절로 움츠려졌다. 많이 추우신가요? 소년의 걱정스러운 어투에 키세가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소년이 저를 건드리니 소년의 손이 닿은 곳부터 따스한 기운이 흘러나오는 듯 했다.


"감사함다."

"아니에요."


 일단 들어가시는게 어떠세요. 소년이 기후와 이질적인 제 옷차림을 보며 말을 했다. 키세도 아무렇지도 않던 모습이 어쩐지 부끄러워 머쓱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이 살고 있는 곳은 바닷가 근처의 나무로 만든 집이었다. 만년설이 소복히 올라가있는 언덕과 잘 어울리는 풍경에 키세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담요와 함께 가져온 따뜻한 얼그레이는 소년과 잘 어울리는 듯 했다.


"손님이 온지 오래돼서 조금 들떠버렸네요."


 말갛게 웃는 소년의 얼굴이 정말 기뻐하는 것 같았다. 이런 순수한 호의는 받아본지도 오래된 탓에 키세는 괜시리 후끈거리는 볼을 만지작거렸다. 이름이 뭐에요? 소년이 질문했다.


"키세 료타임다."

"키세!"

"네."

"따뜻한 이름이네요."


 당신 눈 같아요. 소년의 말에 키세의 얼굴이 잘 익은 홍당무 같이 빨개졌다. 더 이상의 말을 들으면 정말로 얼굴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 그 쪽은 이름이 뭠까? 키세의 말에 소년은 '쿠로코 테츠야'라고 대답했다. 쿠로코, 쿠로코 입 안에서 몇 번 감돌던 이름은 익숙한 듯 감기었다.


"그럼 쿠로콧치라고 부르겠슴다!"

"...쿠로콧치?"
"제가 인정한 사람에겐 무슨무슨 치라고 하거든요!"

"사람, 이요."


 제 말에 쿠로코가 재미있다는 듯 쿡쿡 웃었다. 그 후로도 쿠로코와 이야기를 제법 나누었다. 좋아하는 음식이라던지 좋아하는 동물이라던지. 그러나 그에 대한 것은 그다지 알 수 없었다. 쿠로코의 호의로 가득한 모든 것들을 키세는 기쁘게 받아들였다. 연예계에 살면서 받기 힘든 것들을 쿠로코는 그 짧은 시간 안에 모두 주었다. 어느 덧 창 밖으로 해가 붉은 노을을 만들어냈다.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글쎄요."


 키세의 말에 쿠로코는 곤란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키세군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만날 수 있을검다! 바다로 첨벙 뛰어든 키세가 쿠로코를 향해 환히 웃어보였다. 제 감은 생각보다 정확하거든요! 키세의 말에 쿠로코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얼른 가지 않으면 바닷길이 막힐거에요."

"길이 막혀요?"

"부디 그대의 앞날에 좋은 일만 가득하길."


 쿠로코가 키세의 머리를 툭툭 두드리곤 어깨를 밀자 키세가 바닷속으로 완전히 들어가게 되었다. 돌아가는 길엔 오면서 보았던 산호초들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키세가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미니 매니저가 벌써 왔냐며 반색을 보였다.


"벌써?"

"뭐야. 들어간지 5분도 안되서 나오고. 친구가 없어서 재미 없냐?"

"제가 5분만에 나왔슴까?"

"시간 감각도 사라졌어? 안 놀거면 나와. 내일 촬영 있으니까."


 허둥거리는 그를 매니저가 끌어올렸다. 코디가 들고 오는 수건을 걸쳐주며 감기 조심하라 신신당부 하는 매니저의 목소리는 키세에게 들리지 않았다. 꿈이었나? 얼빵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는 키세의 물기를 닦아주던 코디가 드디어 미친거냐며 웃었다.


"에?"

"머리에 꽃도 꽂고 진짜 이상하네."

"꽃이요?"

"얘 방금 바닷가에서 나왔는데 무슨 소리야."


 코디의 손이 키세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여기, 코디가 건네준 꽃을 바라보았다. 백리향. 생일날 제 탄생화라며 팬들이 보내준 기억이 있었다.


'부디 그대의 앞날에 좋은 일만 가득하길.'


 쿠로코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제게로 스며드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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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와무라!"
"네!"
"내일 시합 있으니까 무리하지 말라고 했잖아?"
"아, 네."
"하여튼 대답은 잘한다니까. 얼른 씻고 들어가. 대충 씻지 말고."
"잘 씻는다니까!"

 꿈을 꿨다. 기억 속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 상자 속에 꽁꽁 숨겨두었던 빛바랜 추억들이 머릿속을 잠식해왔다. 멍하게 방 안의 천장을 바라보고 있자니 점멸하는 시야에 다시 눈을 감고 말았다.

「...이번에도?」
"미안, 못 갈 것 같아."
「...그래. 다음에 우리끼리 보자.」
"하룻치랑 둘이?"
「응, 우리 둘이.」

 그래. 제 대답에 밝아지는 목소리에 하늘을 바라보았다. 조금 눈이 시려운 것 같았다. 아슬아슬한 강의 시간에 헐레벌떡 뛰어가니 평소 같았으면 다들 죽어있을 사람들이 어쩐지 들떠 북적북적했다. 강의실에 들어가 간신히 비어있는 자리를 잡은 사와무라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에이준!"
"오늘 왜 이렇게 시끄러워?"
"몰라. 오늘 무슨 프로선수가 와서 특강해준다는데."
"그래?"

 동기와 시덥잖은 대화를 나누다 교수님이 들어오는 소리에 자세를 바로했다. 교수가 하는 말은 늘 하는 말과 같았다. 어렵게 모신 사람이다, 좋은 기회니 놓치지 말고 잘 들어라. 기분이 좋지 않은 꿈을 꿔 잠을 설친터라 교수의 말을 흘려들으며 엎드리려던 사와무라가 작은 탄성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덜컹- 책상이 움직이며 거친 소리를 냈다.

"미유키 카즈야?"
"사와무라! 앉아라!"
"아, 넵!"

 자신을 바라보며 수근거리는 소리에 재빨리 자리에 앉았다. 저를 보며 키득키득 웃는 얼굴은 2년 전과 다른 것이 없었다. 조금 더 선이 굵어졌나. 키가 더 컸나? 저에게 미유키 선수의 팬이었냐 물어보는 동기들의 말에 질색을 한 사와무라가 여전히 저를 진득히 바라보고 있는 미유키의 시선을 슬며시 피했다.

"...안녕하십니까. 미유키 카즈야입니다."

 저에게서 시선을 뗀 그가 입을 열었다. 프로에 입단했다고 하던데 진짜였나. 자신의 프로필을 말하며 어색하게 뒷목을 긁적이는 미유키의 모습은 제가 아는 미유키가 맞았다. 심드렁하게 턱을 괴고 예의상 올려둔 종이에 낙서를 하는 사와무라를 옆에 앉은 동기가 툭툭 쳤다.

"왜?"
"-세이도 고등학교에서 1학년 때 부터 포수를 맡았고,"
"미유키 선수가 자꾸 너 쳐다보는데."
"2학년 가을 주장이 되었으며-"
"쳐다보던지 말던지."

 그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냥 아직은 조금 만나기 불편해. 그렇게 중얼거리며 사와무라가 결국 책상에 철퍼덕 엎드렸다.

"사와무라군, 집중해주세요. 또 이상한 낙서 하지 말고."
"하아?"

 자신에게로 집중되는 시선에 책으로 얼굴을 가린 사와무라가 미유키를 노려보았다. 무슨 속셈이야, 저 인간! 그저 싱글벙글 웃고 있는 얼굴에 공을 던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자꾸 저를 쿡쿡 찔러오는 동기의 펜을 뺏은 사와무라가 다시 책상에 엎어졌다.

"어디가?"
"출석 또 안한대?"
"응...가게?"
"당연하지. 이따 보자!"

 3시간 연강이니 미유키가 잠깐 쉬는 것이 어떻냐며 제안을 했을 때 학생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나가야 하는 것은 바로 이 틈! 가방을 가지고 밖으로 나가는 사람들 사이로 섞이려는 순간이었다.

"컥-"
"어디 가? 사- 와- 무- 라-"
"그러니까 부모님이 아프셔서..."
"하? 너희 부모님은 나가노에 계시잖아?"
"아니 할아버지가..."
"사와무라."

 제 후드를 붙잡고 놓아줄 생각을 안하는 미유키에 도망가려던 것을 포기하고 가만히 서있으니 슬그머니 손을 놓는 미유키였다. 사와무라? 제 이름을 재차 부르는 미유키에 사와무라가 그럼 이만! 인사를 하곤 밖으로 뛰어갔다. 뛰어가려고 했다.

"하.하.하. 역시 프로 선수는 다르군요!"
"자꾸 어딜 도망가."
"일단 놓아주십쇼. 미유키 카즈야!"
"왜 다시 반말로 돌아온건데."

 제 손을 붙잡고 있는 커다란 손에 사와무라는 정말로 자신이 도망갈 수 없음을 직감했다. 너 하나도 안 변했구나. 그의 말에 사와무라는 자조적인 미소를 띄웠다. 정말 하나도 안 변했을까. 그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있는 것은 아직 어색했다. 그렇게 생각한 것은 비단 저 뿐만이 아닌지 그 역시 잡고 있는 손을 놓지 못한 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미유키 선배는 잘 지냈습니까?"

 제 물음에 그가 눈을 크게 떴다. 놀랐음이 표정에 여실하게 들어났다. 너는? 미유키가 저를 걱정스러움이 담긴 표정으로 바라봄에 그저 고개를 숙일 따름이었다.

"저야 당연히 잘 지냈죠!"
"나는 아니었는데."
"네?"
"아, 강의는 마저 해야지. 여기 앉아있어."

 도망가면 알지? 도망가려던 그 자세 그대로 미유키의 바로 앞에 앉게 된 사와무라가 낭패를 본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왜 여기 있냐. 자리로 돌아온 동기들이 사와무라의 어깨를 툭툭 치며 지나감에 사와무라는 부루퉁하게 동기들의 손길을 받으며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어디까지 이야기 했었죠? 아, 고등학교 때?"

 세이도의 투수진은 항상 훌륭했습니다. 그들의 공을 받는 것은 제 행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미유키가 사와무라를 바라보았다. 오롯이 저만이 담겨있는 그 눈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제 실책이었습니다. 아주 훌륭한 투수를 잃었습니다."

 정처없이 헤매던 눈이 미유키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미유키는 사와무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와무라."
"넵."
"감독님 지시는 들었지?"
"이 사와무라 에이준, 반드시 보스의 기대에 부응해!"
"시끄러워, 사와무라."
"아파!"

 그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뒤를 든든하게 지켜주는 모두, 앞에서 공을 받기 위해 자리 잡은 미유키. 아스라이 흩어져가는 기억에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죄책감에 물든 그 사람의 얼굴이 보고싶지 않았다.

"어디 가?"

"집."


 그 때의 사와무라 에이준이 아니었다. 고등학교 2학년의 사와무라 에이준은 이제 없었다. 이래서 만나고 싶지 않았는데. 눈 앞이 뿌얘짐에 눈을 벅벅 문지르며 강의실을 벗어났다. 하하호호 떠드는 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달리고 달렸다. 나 도쿄에 남아있지 말걸 그랬나봐. 어떤 미련이 남아 자신이 도쿄에 남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사람의 그런 표정은 절대로 보기 싫었다는 것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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