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무더운 여름, 키세가 황금빛 모래알이 펼쳐진 모래사장을 바라보았다.
"나도 바- 다-!"
"안 돼."
"왜!"
"화장 지워지니까."
단호한 코디의 말에 키세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파라솔 안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바다에 와서 몸에 물 하나 묻히지 못하고 지금까지 일을 하고 있자니 온 몸이 찌뿌둥한 것 같았다. 촬영이 끝나면 들어가게 해줄게. 저를 달래는 매니저의 말에 자신이 애냐며 투덜거린 키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른 시작하죠!"
"애 맞네."
"애지 뭐."
키세의 조름으로 빨리 시작된 촬영은 예상보다 이른 시간에 끝이 났다. 내일도 촬영 있으니까 적당히 놀아. 매니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키세가 신나게 바다로 뛰어들었다. 시원한 바닷물이 제 몸을 감싸는 느낌이 기분이 좋아 조금 더 물 속으로 들어갔다. 키세, 멀리 가지 마! 저 멀리서 매니저의 목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일본 맞아?'
오키나와가 일본 본토에서 멀리 떨어져 있긴 하지만 제 시야에 보이는 풍경은 태평양이 아닌 대서양의 바닷속 같았다. 푸르게 빛나는 산호초들을 헤치며 물고기떼들을 구경하던 키세가 물 밖으로 나왔다.
"아."
물을 뜨려고 했는지 그릇을 들고 엉거주춤 서있는 소년과 눈이 마주쳤다. 아, 안녕하심까. 지금 나 좀 바보 같지 않았나? 제 인사에 놀란 표정을 지은 소년을 보며 키세가 생각했다. 안녕하세요. 이내 제 인사를 받아주는 소년에 고개를 드니 제게 손을 내미는 소년이었다. 그 손을 잡으니 덩치에 맞지 않는 힘으로 저를 위로 이끌었다.
"눈?"
키세의 눈에 보인 것은 만년설이 뒤덮힌 푸른 언덕이었다. 수영복 하나만 달랑 입고 있어 차가운 바람에 몸이 저절로 움츠려졌다. 많이 추우신가요? 소년의 걱정스러운 어투에 키세가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소년이 저를 건드리니 소년의 손이 닿은 곳부터 따스한 기운이 흘러나오는 듯 했다.
"감사함다."
"아니에요."
일단 들어가시는게 어떠세요. 소년이 기후와 이질적인 제 옷차림을 보며 말을 했다. 키세도 아무렇지도 않던 모습이 어쩐지 부끄러워 머쓱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이 살고 있는 곳은 바닷가 근처의 나무로 만든 집이었다. 만년설이 소복히 올라가있는 언덕과 잘 어울리는 풍경에 키세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담요와 함께 가져온 따뜻한 얼그레이는 소년과 잘 어울리는 듯 했다.
"손님이 온지 오래돼서 조금 들떠버렸네요."
말갛게 웃는 소년의 얼굴이 정말 기뻐하는 것 같았다. 이런 순수한 호의는 받아본지도 오래된 탓에 키세는 괜시리 후끈거리는 볼을 만지작거렸다. 이름이 뭐에요? 소년이 질문했다.
"키세 료타임다."
"키세!"
"네."
"따뜻한 이름이네요."
당신 눈 같아요. 소년의 말에 키세의 얼굴이 잘 익은 홍당무 같이 빨개졌다. 더 이상의 말을 들으면 정말로 얼굴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 그 쪽은 이름이 뭠까? 키세의 말에 소년은 '쿠로코 테츠야'라고 대답했다. 쿠로코, 쿠로코 입 안에서 몇 번 감돌던 이름은 익숙한 듯 감기었다.
"그럼 쿠로콧치라고 부르겠슴다!"
"...쿠로콧치?"
"제가 인정한 사람에겐 무슨무슨 치라고 하거든요!"
"사람, 이요."
제 말에 쿠로코가 재미있다는 듯 쿡쿡 웃었다. 그 후로도 쿠로코와 이야기를 제법 나누었다. 좋아하는 음식이라던지 좋아하는 동물이라던지. 그러나 그에 대한 것은 그다지 알 수 없었다. 쿠로코의 호의로 가득한 모든 것들을 키세는 기쁘게 받아들였다. 연예계에 살면서 받기 힘든 것들을 쿠로코는 그 짧은 시간 안에 모두 주었다. 어느 덧 창 밖으로 해가 붉은 노을을 만들어냈다.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글쎄요."
키세의 말에 쿠로코는 곤란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키세군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만날 수 있을검다! 바다로 첨벙 뛰어든 키세가 쿠로코를 향해 환히 웃어보였다. 제 감은 생각보다 정확하거든요! 키세의 말에 쿠로코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얼른 가지 않으면 바닷길이 막힐거에요."
"길이 막혀요?"
"부디 그대의 앞날에 좋은 일만 가득하길."
쿠로코가 키세의 머리를 툭툭 두드리곤 어깨를 밀자 키세가 바닷속으로 완전히 들어가게 되었다. 돌아가는 길엔 오면서 보았던 산호초들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키세가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미니 매니저가 벌써 왔냐며 반색을 보였다.
"벌써?"
"뭐야. 들어간지 5분도 안되서 나오고. 친구가 없어서 재미 없냐?"
"제가 5분만에 나왔슴까?"
"시간 감각도 사라졌어? 안 놀거면 나와. 내일 촬영 있으니까."
허둥거리는 그를 매니저가 끌어올렸다. 코디가 들고 오는 수건을 걸쳐주며 감기 조심하라 신신당부 하는 매니저의 목소리는 키세에게 들리지 않았다. 꿈이었나? 얼빵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는 키세의 물기를 닦아주던 코디가 드디어 미친거냐며 웃었다.
"에?"
"머리에 꽃도 꽂고 진짜 이상하네."
"꽃이요?"
"얘 방금 바닷가에서 나왔는데 무슨 소리야."
코디의 손이 키세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여기, 코디가 건네준 꽃을 바라보았다. 백리향. 생일날 제 탄생화라며 팬들이 보내준 기억이 있었다.
'부디 그대의 앞날에 좋은 일만 가득하길.'
쿠로코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제게로 스며드는 것만 같았다.